[상보] 뉴욕증시, 애플 고용‧지출 감축 소식에 하락…다우 0.69%↓
뉴욕증시는 18일(현지시간) 내렸다. 은행들의 실적 호조에 장 초반 올랐으나 경기 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고용과 지출을 줄인다는 애플의 소식에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다우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215.65포인트(0.69%) 하락한 3만1072.61에 마감했다. S&P500지수는 32.31포인트(0.84%) 내린 3830.85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92.37포인트(0.81%) 떨어진 1만1360.05에 거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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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JP모건체이스와 모건스탠리의 엇갈린 실적 발표 이후 골드만삭스 등 은행들의 실적 호조가 장 초반 주가를 상승시켰다.
이날 2분기 실적을 발표한 골드만삭스의 주당순이익과 매출은 모두 시장 전망치를 웃돌면서 주가도 한때 5.6% 급등했다. 이후 상승폭이 완화돼 2.5% 상승으로 장을 마감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도 시장 예상치인 0.75달러를 상회하는 2분기 주당순이익 0.78달러를 발표하며 주가는 소폭 상승했다.
이날 장 마감 후 실적을 뉴욕 시장 발표한 IBM의 2분기 주당순이익과 매출도 모두 시장 예상을 웃돌았다.
그러나 애플이 경기 침체에 대처하기 위해 내년 고용과 지출 규모를 줄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장 후반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
블리클리 투자자문그룹의 피터 부크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CNBC방송에 “2조4000억 달러 규모의 애플이 전복되면 분명 지수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애플이 중국 시장의 분위기, 상품보다 서비스 지출을 늘리는 소비자 선호도 변화 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전체 시장에 중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애플 주가는 2.1% 떨어지며 장 하락세를 이끌었다. 다우지수는 장 초반보다 350포인트 이상 떨어지며 마감했다.
시장은 기업들의 실적 악화가 예상되는 시즌인 만큼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다.
팩트셋에 따르면 S&P500지수 기업들의 2분기 순이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4.2%, 매출은 10.2%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존슨앤드존슨, 넷플릭스, 록히드마틴, 테슬라, 유나이티드항공, 유니언퍼시픽, 버라이즌 등이 이번 주 실적을 발표한다.
투자자들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제기된 1.0%포인트 인상 가능성은 줄어든 모양새다. 전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연준이 0.75%p 금리 인상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통화 긴축 정책 등으로 인한 경기 침체 우려는 여전히 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CNBC는 설명했다.
마크 헤펠레 UBS글로벌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시장은 앞으로 몇 달 동안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며 “인플레이션과 지수들이 안정적으로 바뀔 때까지 시장 심리의 장기적인 개선은 어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날 헤스의 주가는 4.8% 급등했다. 데번에너지와 마라톤오일은 각각 3.6%, 3.5% 가까이 상승했다.
델타 항공이 보잉으로부터 737 맥스 10 항공기 100대를 구입한다는 소식에 보잉의 주가는 소폭 하락한 반면 델타는 약 3.5% 급등했다.
뉴욕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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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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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19.05.2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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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대선 캠페인 나선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연설하는 모습. 그는 범죄의 소굴이던 뉴욕을 탈바꿈시켜 관광과 경제의 중심도시로 키웠다. 정치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도시경쟁력은 물론 나라의 뉴욕 시장 품격도 달라질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 뉴욕을 안전한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뉴욕의 관광객이 지금처럼 연간 6천만 명을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뉴욕은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 및 비즈니스의 도시로 탈바꿈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된 이야기도 아니다. 겨우 20여년 전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뉴욕은 범죄 소굴 같았다. 강도, 마약, 소매치기, 그리고 홈리스들의 천국이었다. 백주대낮에 강도를 당하기 일쑤고, 지나가던 차가 신호등에 서면 날치기 떼가 달려왔다.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차에 스프레이 낙서를 뿌리고 지우면서 돈을 요구하는 등 천태만상의 갖은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다 옆에 들러붙어 돈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폭행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맨해튼 북쪽인 브롱스나 브루클린, 퀸즈도 그랬으며, 맨해튼 한복판의 사정도 엇비슷했다. 지금의 타임스퀘어 뒷골목은 당시에는 마약과 매춘의 거리였고, 노숙자와 강도들의 소굴이었다. 일반인들이 다니길 꺼려했던 곳이다.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가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담력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다.
어퍼 이스트나 첼시, 미드타운과 웨스트사이드 등에는 불꺼진 건물 들이 많았고, 사람들이 살 수가 없어 외곽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자 뉴욕의 중심은 공동화됐고 뒷골목은 슬럼화됐다.악의 소굴, 쓰레기와 낙서 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적어도 뉴욕 시장에 ‘루돌프 줄리아니’가 취임하기 전까지 그랬다. 루돌프의 강력한 행정지도와 범죄 소탕 작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뉴욕은 상상하기 힘들다.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 시장에 오르자 뉴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타임스퀘어 부근의 노천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뉴욕시민들이 평온해보인다.(뉴욕=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그는 1944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뉴욕대학교 석사를 마친 후 변호사 자격증을 따 뉴욕의 검사로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정치에 몸담고 1993년에 뉴욕 시장 선거에 당선된다. 시장 취임 후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범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처벌했다. 범죄의 싹도 가려내 잘라냈다. 이른바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도 정비했다. 지하철, 거리, 공원, 후미진 빈 건물 등을 샅샅히 뒤져 범죄소굴을 청소했다. 오늘날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타임스퀘어 거리나 브라이언트 파크 뉴욕 시장 등 대부분의 장소가 그렇게 정화되어갔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끈질긴 소탕 작전으로 뉴욕의 범죄율은 급격하게 줄고, 거리가 깨끗해지면서 관광객들이 급증했다. 단 몇 년 만에 완전히 색다른 도시로 바뀐 것이다. 살인강도는 절반으로 줄었고 경범죄는 60% 이상이나 줄었다.
어느 한 사람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리더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국가든 도시든 어떤 리더가 어떻게 그 조직을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다. 결과는 뉴욕시의 성공이었고 영웅은 그렇게 탄생했다. 혜택은 뉴욕 시민에게 돌아갔다.
도심은 사람들로 붐볐다. 외곽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시내로 들어와 살기 뉴욕 시장 시작했다. 1980년대 텅 빈 건물들의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부동산 가격도 서서히 올랐다.
1980년대 10여 가구가 들어있는 작은 건물 가격이 50~60만 불이었는데 지금은 500만 불을 줘도 살 수가 없다. 30년 전에는 텅 빈 건물을 팔려고 해도 살려는 사람이 없었다. 남들 따라 롱아일랜드나 뉴저지로 가서 넓은 대지에 풀장 딸린 고급 주택을 매입하며 거기서 사는 게 꿈이었고 유행이었다.
당시 맨해튼 건물이 팔리지 않아 할 수 없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오히려 수십 배나 올라 횡재를 한 셈이다. 거꾸로 뉴저지나 롱아일랜드 주택 가격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을 팔고 맨해튼으로 입성하고 싶어도 들어올 수가 없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다. 루돌프 줄리아니도 뉴욕 시장 흙수저 출신이다. 당시 하층민과 흑인 동네인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는 노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으로 범죄 경력도 있었다. 금수저가 아닌 가정에서 성장했다.하지만 똑똑하고 영리한 젊은이였다. 검사로서 재직 시 범죄에 대한 완벽한 구조와 그 생리를 알고 터득했기에 시장직 출마 당시부터 ‘범죄와의 전쟁’을 선거 이슈로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의 선거 전략이 먹혔고, 당선 후 과감하게 공약을 실천했다. 상대방을 잘 알고 시작하는 게임이기에 어렵지 않게 추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시민의 반응도 당연히 폭발적이었다. 강력한 뉴욕 시장 리더십으로 거대 도시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은 점을 높이샀다. 법과 규칙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지 않는 것을 모두 걷어냈다. 줄리아니의 리더십이 주는 교훈을 뭘까.서울과 같은 거대 도시나 국가가 좀 더 성숙하고 품격있는 선진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선 ‘줄리아니식 개혁’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일지도 모른다.뉴욕타임즈는 줄리아니를 2001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뉴욕 코인시황/마감] 비트코인 점유율 하락 … 암호화폐 상승 증시는 하락
18일(현지시각) 암호화폐 시장은 비트코인이 2만2000달러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전반적인 상승폭이 다소 축소되며 마감했다. 톱10 종목 중 9개가 상승했고, 톱100 중 85개의 가격이 올랐다.
# 비트코인 점유율 하락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비트코인 가격은 뉴욕시간 오후 4시 기준 2만1636.76달러로 24시간 전 대비 뉴욕 시장 2.83% 상승했다.
이더리움 8.59%, BNB 2.51%, XRP 2.16%, 카르다노 5.28%, 솔라나 2.44%, 도지코인 2.86% 가격이 올랐다.
이 시간 암호화폐 시장의 시가총액은 9984억달러를 기록했고, 비트코인의 비중은 41.4%로 감소했다.
자료: 코인마켓캡 (뉴욕시간 7월18일 오후 4시 기준)
# 선물시장 상승세 지속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뉴욕 시장 비트코인 선물가는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7월물이 510달러 상승한 2만1700달러, 8월물은 510달러 오른 2만1705달러를 기록했다. 이더리움 선물 가격은 7월물이 63.50달러 상승해 1256.00달러, 8월물은 63.00달러 오른 1256.50달러에 거래됐다.
# 암호화폐 상승 증시는 하락
온체인 분석업체 크립토퀀트는 비트코인 채굴업자들이 지난 몇 달 동안 사상 최대 규모의 비트코인을 매도하면서 커피출레이션 수준에 도달해, 비트코인 가격이 단기적으로 2만달러 훨씬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립토퀀트는 지난 6월 들어 시장이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면서 채굴업자들은 잠재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전반적인 위험 부담을 낮추기 위해 비트코인 매도가 불가피했다고 지적했다.
시장 분석업체 산티먼트의 자료에 따르면, 1000 ETH에서 1만 ETH를 보유한 고래 주소 수가 지난 5월 이후 몇 주 동안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이더리움 고래 주소 수는 전날 하루 동안 131개 증가해 총 6666개를 넘어섰다.
이더리움 보유 주소의 최근 급증은 9월19일로 일정이 발표된 ‘머지’(merge) 업그레이드에 대한 시장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 서비스업체 파인더(Finder)가 최근 핀테크 전문가들 대상으로 실시한 카르다노 가격 전망 조사에 따르면 카르다노의 금년 말 가격은 0.63달러로 예측됐다.
디크립트에 따르면, BAYC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메타버스 게임 아더사이드(Otherside)의 유틸리티 토큰 에이프코인 가격이 22% 상승했다.
에이프코인의 급등세는 BAYC 개발사 유가랩스(Yuga Labs)가 일부 이용자를 대상으로 아더사이드 메타버스 시연 기회를 제공한 후 시작됐다.
뉴욕 피자, 올드 스쿨 vs. 뉴 스쿨
몇 해 전 뉴욕 시장 빌 더블라지오가 취임한 직후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피자집에서 포크와 나이프로 피자를 먹는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대체 어떤 뉴요커가 (손이 아닌) 포크와 나이프로 피자를 먹는가?”라며 경악했죠.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이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더블라지오 시장은 “원래 이탈리아에서는 그렇게 먹는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피자는 아무리 치즈와 올리브유가 흘러도 손으로 들고 접어서 먹는 것이 뉴욕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은 를 비롯한 주요 매체에서 보도할 정도로 파장이 컸습니다.
저기요, 시장님? 아니 잠깐만, 손에 든 건 혹시 포크인가요?
이 모든 논란은 물론 반쯤 농담입니다. 진정한 뉴요커인지 검증하는 것은 원래 뉴욕 사람들의 오래된 유희죠. 하지만 뉴욕 사람들이 피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뉴욕 피자가 나폴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그들에게는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피자의 본고장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있는지도 별 상관이 없죠. 그들에게 뉴욕 피자는 뉴욕의 전통 음식이니까요!
그래서 뉴요커들은 숙취에 시달리는 주말 아침, 부스스한 머리에 슬리퍼를 신고 갈 수 있는 동네 조각 피자집부터 친구가 뉴욕에 여행 올 때 꼭 데리고 가야 하는 피자집까지, 누구나 자신만의 ‘최애’ 피자집 리스트를 가지고 있답니다. 뉴욕 최고의 피자에 대한 논쟁도 역사가 깊어요. 우리나라 냉면 애호가들이 평양냉면집의 계보를 뉴욕 시장 줄줄 읊으며 어떤 스타일이 가장 맛있는지 논쟁을 벌이는 것처럼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 피자집과 새롭게 등장한 신흥 피자집 간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뉴욕의 영웅 Mayor LaGuardia 시장
미국은 1900년대를 넘어 오면서 세계 최강의 국가로 탄생한다. 영국의 산업 자본이 쇠퇴하면서 그 세력들은 새로운 기회의 땅 미국으로 몰려든다. 그 가운데 컨트롤타워로서 뉴욕이 막강한 도시로 급부상한다. 1800년대의 뉴욕은 유럽 너머의 변방, 그저 그런 도시였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는 도시였다.
석유, 철강, 전기 등 신문명의 물질들이 서서히 새로운 시장을 찾아 이곳으로 몰리고 관련 산업들이 이곳을 통해서 이합집산 된다. 도시의 발전은 급물살을 탄다. 외형과 규모 면에서 유럽의 도시들을 뛰어넘는다. 유럽의 선진 문명 앞에 항상 작아졌던 뉴욕, 1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사이 뉴욕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도시로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뉴욕을 새로운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 당돌한 이탈리안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H. La Guardia).
뉴욕 시장에 세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시장을 역임한다. 그것은 뉴욕의 축복이고 미국의 행운이었다.
라과디아는 뉴욕 맨해튼의 전통적인 동네인 그리니치 빌리에서 1882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잠시 애리조나에서 살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탈리안, 어머니는 유대인계 이탈리안이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사망한다. 미 육군에서 밴드마스터로 일했던 부친이 군 납품 불량 식품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 비극은 그에게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굳은 결심을 갖게 한다. 훗날 그가 뉴욕 시장 공직 부패 척결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 라과디아는 유럽 지역 미국 대사관 영사관에서 근무한다. 그 덕에 유대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에 능통했다. 귀국 후 뉴욕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1910년 뉴욕대 졸업 후 뉴욕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이민 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법률 서비스와 변론을 맡는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정치에 입문, 당시 가장 문제 지역 중 한 곳인 이스트 슬럼가에서 1916년 공화당 후보로 하원 의원에 당선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의원직을 사임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미군 장교로 임관하여 폭격기 조종사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한다.
1차 대전 종전 후 귀국, 1919년에 하원 의원에 재선된다. 열정적인 의원으로서 여성 참정권 옹호, 미성년자 노동 금지, 근로자들의 복지 입법 등에 앞장섰다. 공화당 의원이면서 공화당 정책에 반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던 그는 민주당의 아성인 뉴욕에서 공화당 후보로 시장직에 도전한다. 이미 시장직에 도전해 한 두 차례 실패한 바 있다. 절치부심하던 끝에 당내 라이벌이 스캔들로 인해 후보 사퇴를 해 손쉬운 승리를 점쳤으나 예상치 못한 다른 후보의 출현으로 선거전은 혼전이었다. 한마디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난타전 끝에 중산층인 독일계 이민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현직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암흑 도시 뉴욕 바꾸자” 마피아 소탕
1930년대 뉴욕은 대공황으로 경제 파탄에 빠진다.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도시의 밤은 물론 낮까지도 마피아들의 세계다. 살인, 매춘, 도박이 판치는 암흑의 도시였다. 이러한 시절 그는 시장에 당선된다. 1934년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마피아에 선전 포고를 한다. 곧바로 부패한 경찰 조직도 개편한다. 마피아의 주수입원이었던 슬롯머신 도박장 소탕에 들어갔고, 뉴욕 마피아 조직의 두목인 찰스 루치아노(Charles Luciano)를 전격 체포한다. 결국 마피아 조직을 와해시킨다. 뉴욕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루치아노는 1946년 이탈리아로 영구 추방된다.
그는 공직 부패와 특권 척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싸웠고, 평생을 빈곤층과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시장 재임 기간 내내 뉴욕시의 행정 업무를 그림자처럼 조종·지배하던 민주당 지지 정치 세력인 전통의 막강 조직 ‘태머니 홀’(Tammany Hall)과도 강하게 맞서 싸웠다. 그의 뉴욕 시장 순수한 열정과 노력에 뉴욕 시민들은 물론 그의 정적들마저 신뢰를 보였다.
공화당원인 라과디아는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New Deal) 정책’에 적극 찬성한다. 국가는 자유방임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경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실업자 구제와 경제 구조 및 관행을 철저하게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그의 이런 소신 덕택에 뉴욕시 공공 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연방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공항, 지하철, 공원, 교량, 주택, 의료 시설 등을 대폭 확충하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된다.
라과디아는 다혈질 성격에다 지나치게 노동자 편에 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히틀러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광신자로 공개적으로 몰아세우며 해외 파병 근무를 희망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과 의회는 군인으로서보다는 뉴욕 시장으로서 뉴욕시와 미국을 위해 더 큰 봉사를 하라며 그의 고집을 꺾느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1947년 9월 21일자 는 라과디아의 죽음을 “뉴욕의 수많은 공공 건물들 만큼이나 많은 역할을 했던 작은 거인이 숨을 거뒀다”고 표현했다. ⓒOlga Popova/Shutterstock
미국 역대 시장 중 1위로 뽑힌 작은 거인
1947년 9월 21일 는 한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게재한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그는 때로는 화재 현장에 달려 나가고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날아다니는 등 모든 문제의 현장들을 누비고 다녔다. 타고난 투사, 그의 상대가 히틀러든 길가의 시정잡배였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맞섰다. 뉴욕의 수많은 공공 건물들 만큼이나 많은 역할을 했던 이 작은 거인이 숨을 거뒀다.”
당시 뉴욕은 미국의 48개 주 가운데 가장 위험한 도시였다. 마피아를 몰아냈던 인물이 64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췌장암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온몸을 던져 뉴욕시의 부패와 폭력에 맞서 싸운 법조인이자 정치가이자 행정가이다. 그의 사망 후 뉴욕시는 모든 공공 건물에 30일간 조기를 게양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3년 뉴욕의 3대 국제 공항 중 하나를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으로 명명했다. 1993년 미국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여론조사에서 뉴욕 시장 미국 역대 시장 중 1위로 뽑히기도 했다.
공직 기간 중 수많은 일화를 남겼던 라과디아가 뉴욕시 법정에서 주재했던 빵을 훔친 노인에 대한 경범죄 재판 일화는 유명하다.
배고픔을 못 견뎌 빵을 훔친 노인에게 유죄를 인정, 10달러 벌금을 선고한다. 법정 안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이 노인만의 잘못이 아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한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한다”라고 판결한 것이다. 그 노인은 벌금 10달러를 내고도 남은 47달러 50센트나 되는 큰 돈을 가지고 귀가했다. (* 곽용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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